(7) 실크로드 순례기 (양관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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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흥륜사 댓글 0건 조회 567회 작성일 16-04-18 23:19본문
(7) 실크로드 순례기 (양관고성)
간쑤성 둔황은 오아시스 도시로 옛날 실크로드의 중요한 거점이었다.
둔황에서 남서쪽으로 70Km지점에 인도 천축국(天竺國)으로 가는 양관고성(陽關故城)이 있다. 이 관문을 지나 험난한 아얼진산맥과 곤륜산맥을 돌아서 인도로 가려면,메마른 타클라마칸사막으로 들어서야 했다.양관고성에는 장건(張騫)동상이 서있다. 장건은 서역원정 로를 개척하여 실크로드의 토대를 마련한 사람이다. 그는 기원전 139년 서역의 대월지국과 교류에 나섰다가 흉노에게 잡히고 만다. 그러나 15년 동안의 포로생활에서 풀려나 126년 한나라로 돌아와 서쪽 변방 지역의 상황을 알리게 된다. 123년 한나라는 흉노 정벌에 나섰고, 장건은 큰 공을 세웠다. 그는 또 119년 운남에서 인도로 이어지는 차마고도를 개척하기도 했다. 장건 동상 좌우에는 두 개의 건물이 있는데 북쪽이 양관장성(兩關長城) 진열청이고, 남쪽이 사주지로(絲綢之路) 진열청이다. 양관장성이란 옥문관과 양관으로 이어지는 긴 성을 말하고, 사주지로란 실크로드를 말한다.
양관장성 진열청에 들어가면, 장건의 서역원정과 관련된 지도와 그 옆에는 당시 사용하던 무기, 생활용품, 도자기, 기와,동전등이 전시되어 있다. 신라의 혜초도 당나라의 현장법사도 이 길을 따라 천축국을 다녀왔다. 또한, 고구려의 고선지(高仙芝)장군도 망국의 한을 안고이 길을 지나, 당나라를 위한 서역정벌에 나서, 이슬람교도들이 세운 사라센제국의 동진을 막아냈다고 한다. 둔황이 당나라 때 번성했던 도시라고 한다면, 양관(陽關)은 한나라 때 만들어진 군사적 요새이다. 지금은 흙벽돌로 만들었던 봉화대를 비롯한 성터의 폐허만 남아있지만, 한나라 당시 실크로드를 개척하고 한 무제에게 역설했던 장건의 동상이 입구에 버티고 서있다.
양관고성 주차장에 내려 “양관고성” 현판이 걸린 큰 대문을 지나 조금 걸어서 들어가면, 옛 양관의 고대유적을 전시해 놓은박물관이 나온다. 양관고성이 실크로드의 거점도시로써 이곳을 통해 문물이 유입된 것을 알리는 진열품들 중에는 당근. 호두.포도. 석류. 오이. 수박. 대추. 등 수많은 과일과 식품들이 양관을 통해 동양권으로 유입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박물관에서 봉수대까지는 걸어갈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동차를 탄다. 날씨가 더워 걷기에는 조금 무리가 따르고, 시간도 절약하기 위해서다. 전동차에는 10명이 탈 수 있어 우리 순례단 17명이 두 대에 나누어 타니 딱 맞다. 가마솥 같이 무더운 날이지만,햇살을 가려주는 차를 타고,바람을 가르며 6분정도 달리니 봉수대에 닿는다. 봉수대는 양관의유적 중 유일한 진본이다. 먼저 봉수대와 양관고지란 지석이 서 있는 곳으로가 기념사진을 한다.유사시 이곳 봉수에서 불이나 연기를 피워 위급한 상황을 안서도호부에 알렸을 것이다.봉수대 앞에는 최근 만든 양관고도(古道)주랑이 있다. 이 건축물은 관광객들을 위해 만든 것이라서 역사성은 없지만,뜨거운태양을 피하면서 고적에 펼쳐진 사막을 조망하며 기념촬영을 할 수 있어서 좋다.
주랑에서 다시 오른쪽 언덕을 올라 전망대에 이르니 양관박물관과 도위부 그리고 병영이 한 눈에 들어온다. 또 사막너머로푸른 오아시스가 보이고, 양관이 서쪽 타클라마칸사막으로 들어가는 입구임을 다시 한 번 절감한다. 봉수대에서 내려와 다시 전동차를 탄다. 날씨는 무덥지만 정말 멋지다. 이곳을 지나던 옛 관리들은 아마 우리가 전동차를 타고 달리듯 말을 타고 달렸을 것이다.
봉화대를 내려와 기념품가게에서 골동품 몇 점을 구입하고 음료수와 수박으로 마른목을 축이며 몸을 시킨다. 양관고성에는 구마라습 스님이 새운 백마 탑이 있다. 여기 백마 탑이 서있는 자리는 그 옛날 산스크리트 불경을 중국어로번역하여 역경사에 빛나는 공적을 이룬 구마라습 스님이 머물던 곳이다. 기록에 의하면 384년 구자국의 승려인 구마라습스님은 불경을 백마에 싣고 중국에 불교를 전하기 위해 장안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타클라마칸사막을 넘어오던 백마가 힘든 고난을 이겨내지 못하여 그만 죽고 말았다고 한다.
스님은 마침내 둔황의보광사에 도착하였고, 이곳에 잠시 머물며 역경작업에 몰두하였다. 그런데 죽은 백마가 늘 마음에 걸려 그를 기리기 위해탑을 세워주었는데, 이 탑이 곧 그 백마의 넋을 기리는 탑이다. 구마라습 스님의 간절한 마음으로 새운 백마 탑도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해 무너졌고, 현재의 탑은 옛 모습대로 완전히복원 되었다. 형태는 라마불교식으로 2층 기단에 9층 구조로 장엄하게 새워져 있다. 이 백마 탑을 새운 구마라습 스님은 인도와 중국사이에 있는 구자국에서 태어나 산스크리트어와 중국어에 능통했던 스님이다. 인도 원전불경을 중국어로 번역하여 동방에 부처님의 진리를 전파하고 중생을 일깨워 준 화현보살이다. 평소 구마라습 스님이 번역한 금강반야바라밀경을 읽을 때마다 그분을 떠올려 왔다. 그런데 오늘 이 양관에서 경전 속에서만 보아도던 거룩한 스승을 친견하게 되었으니, 이보다 더 환희하고 반가운 일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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