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소림사 참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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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흥륜사 댓글 0건 조회 921회 작성일 08-12-15 20:28본문
중국 소림사 참배 글
2008년 10월3일부터 9일까지 17명의 불자님들과 함께 중국불교 4대성지의 하나인 오대산 문수도량을 친견하기 위해 아침 8시 인천공항에서 정주행 항공기에 오른다. 오대산 문수성지와 소림사 용문석굴 최초의 사찰인 백마사 운강석굴 조주선사가 주석하시던 백림선사와 임제원 등은 그동안 많이 친견하고 싶어 하던 곳이어서 기대와 설레임으로 넘친다.
하남성 정주鄭州
인천공항에서 하남성 정주鄭州 까지는 항공기로 2시간이 거리이고. 시차는 한국보다 1시간이 늦게 간다. 정주는 북경에서 695㎞ 떨어진 곳으로 인구는 500만명이고, 면적은 7, 446㎢이며 3.500년의 역사를 가진 고도 이다.
정주는 황하 유역의 기름진 평원에서 밀을 비롯하여 목화 대추등 농작물이 많이 재배되고, 강우량이 적어 당도 가 높아 맛이 좋다. 농업뿐 아니라 석탄, 철광, 전력, 등 중공업이 발달한 곳이며, 정鄭씨의 본향이란 말에 남다 른 감회를 느낀다.
특히 정주가 속한 하남성은 중국의 8대 고도古都 중 소림사와 백마사 북망산 등이 있는<낙양>과 갑골문자를 만들고, 현장법사가 태어난 <안양> 춘추전국시대를 펼쳤던 위. 양. 한. 주.북송.금.나라의 도읍지였던<개봉 과 정주 등 고도시를 가진 역사와 문명의 발상지다.
★숭산 소림사少林寺
날씨가 쾌청하고 좋아 순례자 모두의 기분은 절정이다.버스로 1시간을 달려 등봉시에서 점심공양을 들고 소림 사 입구에 도착하니 경내로드는 1km의 넓은 대로가 참배객들로 인해를 이루어 사람에 부닥쳐 걸을 수가 없다.
소림사는 하남성 등봉시 숭 산 소실봉 중턱 숲속에 위치하고 있다하여 소림사라 한다.소림사는 대개 달마대사 가 창건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실은 495년 북위 효문제 때 인도에서 온 발타선사가 창건하였다. 발타선사는 여섯 명의 친구와 함께 출가를 하였지만 도반들은 다 성불을 하였는데, 자신만 성불하지 못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밤 꿈에 부처님이 나타나서“중국 숭산으로 가서 공부하라는 개시를 받고 이곳으로 와서 효문 제의 명으로 소림사를 창건하고 각고의 정진 끝에 도를 이루고 30년간 소림사에 있다가 떠났다고, 경덕전등록 은 전한다.
발타선사가 소림사를 떠난 2~3년 후 인도에서 온 보리달마가 소림사에 와서 9년간의 면벽관심 수행을 통하여 동토에 선풍을 진작시키며, 혜가를 비롯한 수많은 제자를 배출하였고, 수행의 건강단련으로 지금의 중구무술을 창시하였다고 한다.
그는 인도를 떠나 바다를 통하여 동쪽인 중국으로 온 뒤 광동성 광주에서 불법을 전파하다가 갈댓잎을 타고 양자강을 건너 소림사로 오는 신통을 보여 명성을 얻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일위도강 이야기다.
또 한 번은 양무제가 내가 불교를 위하여 만불 만탑을 조성하고, 수많은 스님들의 수행을 도왔으니 그 공덕이 얼마나 되겠느냐”고 묻자, 달마가“공덕이 없다”하자, 양무제가 크게 노하여 대사에게 사약을 내려 웅이산에 묻어 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어느날 송운이란 사신이 총령 강가에서 죽었다는 달마스님이 지팡이에 짚신 한 짝을 매달고 어디론가 가는 것을 보았다. 놀라서 무덤을 파보니 육신은 온데간데없고 관속에 짚신 한 짝만 남아있었다.
달마대사는 부처님의 28대 제자로서, 150년간 이 세상에 살면서 숱한 기행과 일화를 남기신 큰스님이다. 달마가 소림사 천연 석굴에서 9년 동안 바라보고 면벽하던 돌에 달마의 모습이 그대로 투영 되어 전해온다는 말을 듣고 유심히 살펴보았다.
거무스름한 돌에 좌선하는 달마상이 찍혀진 면벽 석은 높이가 석자쯤 되었는데 소림사 미타전 유리진열장에 모셔져 있었다. 경내는 한없이 넓고 사찰의 규모도 크고 장엄하다. 마침 중국의 국경절이라 넓은 도량은 사람들로 물결을 이룬다.
참배객들의 사이를 뚫고 대웅전에 예불을 올리고 , 법당 앞 향로에 분향을 올리며 흥륜사 불자들과 사찰의 발전을 축원 올린다.
산 진. 글 . 흥 륜 사 주 지 정 법 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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