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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성지순례 (대승불교 산실 바이샬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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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흥륜사 댓글 0건 조회 635회 작성일 16-04-18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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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성지순례 (대승불교 산실 바이샬리 )

 

[18일] 

바샬리는 부처님당시 가장윤택한 도시었고,부처님께서 45년간 교화를 위하여 남북을 오고가시며 자주 들리시며 수행하시던 곳이다.특히 부처님 당시는 물론 석존이 열반에 드신 후 이곳 바이샬리 승원에는 수많은 부처님제자들이 수행하며 경전을 결집하고 재래의 소승불교를 대승불교로 전환시킨 역사적인 장소이다.


그뿐 아니라 부처님을 길러주신 마하파사파티 이모님이 출가하여 교단 최초로 여승이 탄생한 비구니의 산실이며,대승불교의 거성인 유마거사가 태어난 고향이기도하다.

특히 부처님은 이곳에서"자귀의自歸依. 법귀의法歸依.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이란 유명한 유교를 남기시고"3개월 후 나는 열반에 들것이다."라고 예언을 남기고 입멸 처인 쿠시나가르로 떠나신 곳이기도 하다. 

커다란 절터와 석주들이 여기저기 서 있고,큰 호수가 있는 것을 보아,그 옛날 승원의 규모를 짐작케 한다.넓은 평원에는 사탕수수밭과 야자수 망고 숲들이,이국적 정취를 물씬물씬 풍긴다.몇 년 전 파트나에서 이곳까지 갠지스강 위로 10.5km 세계에서 제일 긴 다리를 건설하여 볼만하다. 


부처님 사리를 봉안했던 아쇼까왕 스투파 여래의 법 안에서는 모두가 하나 파트나 도심지 북쪽으로 흐르는 강가강은 강폭이 바다와 같이 넓어 유람선을 타는 재미가 쏠쏠하지만 일행은 바이샬리로 가 아쇼까왕 석주를 친견하기로 한다.

파트나의 강가강 강폭이 바다와 같은 까닭은 네 개의 강이 만나기에 그렇다.히말라야에서 발원한 칸타키강과 골고라강,그리고 야무나강과 데칸고원에서 시작한 손강이 합류하여 흐르기 때문이다.부처님은 여기 강물을 비유하여 신분의 차별이 없음을 자주말씀하신 적이 있다.

세상에는 바라문,크샤트리아, 바이샤,수드라와 같은 신분차별이 있지만 여래의 법안에는 차별이 없다.네 개의 강이 마침내 하나가 되어 흐르듯 여래의 법 안에서는 모두 다 하나가 된다.” 파트나에서 바이샬리까지 70km쯤 된다하니 버스로 2시간이면 넉넉할 것 같다.유마거사의 고향인 바이샬리를 한역하면 비야리(毗耶離)혹은 비사리(毘舍離)이다. 

바이샬리는 부처님과 아주 인연이 깊은 땅이다.


파후푸트라카 (多子塔)에서 마하가섭을 제자로 맞아들이기도 했고, 카필라성을 나와 첫 스승을 만난 곳이기도 하며, 정각을 이룬 뒤 이곳으로 와 이적으로 가뭄과 질병을 퇴치했고 여성의 출가를 허락했으며,열반 3개월 전에 또 다시 마지막으로 들렀던 곳이다.


그만큼 부처님은 바이샬리를 사랑하였고, 또 바이샬리 사람들은 부처님을 존경하였다.부처님이 열반을 앞두고 바이샬리를 떠나실 무렵 교외에 있는 차팔라 거리로 나가 탁발하고 돌아오는 길에 걸음을 멈춘 채 아난에게 말했다.

“여래가 이 아름다운 바이샬리 거리를 보는 것도 마지막이구나!”부처님이 바이샬리를 떠나자 사람들은 흐느끼면서 부처님 뒤를 따랐다. 부처님과 헤어지는 것이 안타까워 발을 동동 굴렸다. 그러나 릿차비족 사람들은 칸타키강에서 부처님과 이별해야 했다. 부처님은 강을 건넜다.그래도 릿차비족 사람들이 강 저편에서 흩어지지 않고 서 있자 부처님은 강물에 발우를 띄워 보냈다. 부처님이 릿차비족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선물이던 것이다.


현재 남아 있는 아쇼까왕 석주 중에서 가장 완벽한 모습의 석주.부처님의 열반지인 쿠시나가라를 바라보고 있는 석주의 사자상에서 전륜성왕 아쇼까왕의 불법에 대한 예경이 느껴진다. 

부처님 열반 100년 후 시작된 계율 해석 문제로 대승불교 탄생순례단은 아쇼까왕 석주를 친견하기에 앞서 부처님이 열반시 8등분한 사리 중에서 바이샬리국 몫으로 받은 사리가봉안됐던 스투파 유적지로 먼저 가본다.바이샬리 왕이 조성한 스투파터 앞에는 제법 큰 카라우나 포카르 호수가 있는데 볼수록 성스러움이 느껴왔다.


호수 저편에 일본 절의 흰탑이 보인다.인도의 불교성지를 순례하면서 보는 것이지만 중요 성지에는 반드시 일본 사원이 있다.우리보다 불교종단의 경제도 좋고,교화에 대한 불심도 깊은가 보다.일본 절 부근의 우거진 숲이 제2차 경전결집의 장소로 추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열반하신 지 100년경 계율 문제로 바이샬리에 사는 젊은 수행자들과 서인도와 동인도에 사는 노수행자들 간의 갈등이 제2차 결집의 요인이 되었다.어느 날,아난의 제자이자 계율에 밝은 서인도 출신의 야사 장로가 상업도시 바이샬리에서 젊은 수행자들이 신자들로부터 금과 은화를 시주받는 것을 목격하고는 깜짝 놀랐다.


야사 장로는 즉시 바이샬리의 젊은 수행자들에게 금화와 은화를 시주받는 것은 계율에 어긋난다고 지적했다.그러자 젊은 수행자들은 이제는 시대가 달라졌다.“고 반발했다.실제로 바이샬리 수행자들은 탁발에 의존하며 숲속 수행에서 사원 수행환경으로 바뀌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돈이 필요하여 시주를 받았던 것이다. 

야사 장로는 바로 바이샬리를 떠나 동인도와 서인도의 수행자 대표를 4명씩 뽑아 돌아왔다.노수행자 중에는 아난의 직계 제자인 법랍 120년의 사르바카마 장로를 비롯하여 700명의 장로가 참여했다.


그래서 제2차 결집을 칠백인 결집(七百人結集),이라고도 불렀다.야사가 주도하여 논의된 내용은 십사비법(十事非法)(열 가지 옳지 않은 일)이었다. 즉 스님들이 음식에 맛을 내는 소금을 지니고 다니는 것도 비법이고,발효된 우유나 곡식으로 발효시킨 술이나 과즙을 먹는 것도 비법이고, 금화나 은화를 시주받는 것도 비법이라는 등등이었는데, 10가지나 됐다.


이러한 내용의 시주 물은 당시 바이샬리 사람들의 높은 생활수준에서는 부담될 것이 없었지만 장로들은 제 1차 결집 때 정한 계율을 내세워 제동을 걸었다.이뿐 아니라 불교는 일반 신도들을 배제한 채 수행자들 중심의 불교를 지켜야 한다고 소승불교를 주창하고 나어자, 젊은 수행자들이“그 것은 부처님의 참 된 뜻을 받드는 바른 불교가 못 된다.고 반발하여 합리적인 불교, 대중적인 불교, 시대중생들과 더불어  함께하는 불교를 제창하고 나온 운동이 곧  대승불교가 탄생하는 동기가 된 것이었다.   

바이샬리에 부처님 사리를 봉안한  스투파 터에 씌운 양철지붕이 별로  아름답지는 못한 것 같다. 1958년 발굴조사 때 부처님의 유회(遺灰)사리가 발견되었다고 하여 스투파 기단을 보호하기 위해 그랬다고 하지만  하루빨리 스투파를 복원했으면 좋겠다.아쇼까왕이 이곳의 사리 중 일부를 일행이 지금 가고있는 아쇼까왕 석주 옆의 스투파에 봉안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아쇼까왕이 바이샬리로 순례 와서 조성한 스투파이기 때문이다.


아쇼까왕이 바이샬리에 왜 석주를 세운 것일까,

아쇼까왕 석주와 스투파 입구에 있는 마을은 인도의 궁벽한 농촌 중에서도 가장 원시적인 모습이다.천인(天人)이 어떤 모습인지 알려면 의식주가 풍요로웠던 릿차비족 사람들을 보라고 한  부처님의 말씀이 무색하다. 부처님께 망고동산을 기증한 유녀(遊女) 암바빨리가 살았던 마을치고는 너무나 초라하다. 마차들이 부딪칠 정도로 번화했던 거리가 소와 염소가 꼴을 먹고 있는 조용한 거리로 변해 있다.


그러나 아쇼까왕 석주를 보고 너도나도 놀란다. 지금까지 친견한 탑파 중 가장 완벽한 모습의 석주였다. 석주 상단의 사자상은 시대가 그토록 흘렀지만 완벽하다.아쇼까왕은 좀 전에 보았던 바이샬리 왕이 조성한 스투파에서 부처님 사리를 가져와 이곳에 봉안하기 위해 스투파를 만든 뒤 석주를 세웠을 것이다.

‘아쇼까왕이 세운 석주의 사자상은 북쪽을 바라보고 있다. 부처님이 열반하신 쿠시나가라 땅을 응시하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이 바이샬리에서 열반을 선언하고 마지막 설법한 것을 기리기 위해 그랬던 것은 아닐까.

원숭이 연못 저편에 바이샬리 왕이 대림정사를 지어 부처님에게 기증한 것은 은혜를 갚기 위해서였다. 당시 바이샬리는 오랜 가뭄으로 사람들은 기근과 질병에 시달렸는데, 바라문이나 육사외도들이 해결하지 못하자 왕은 부처님에게 사신을 보내 재앙을 해결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부처님은 바이샬리 땅을 밟게 되었고 부처님은 아난에게 보경<寶經>을 외우게 하고 자신의 위 신력으로 가뭄과 질병을 물리쳤던 것이다. 이에 바이샬리 왕은 부처님에게 대림정사를 지어 기증했고 부처님은 2개월 동안 머물렀다고 한다.

지금은 벽돌 무더기만 남아 있지만 당시 부처님은 대림정사에서〈화엄경입법계품을 설했고, 양모 마하파사파제 카필라성 여인 500명을 이끌고와 세 번을 간청하자 출가를 허락하여 비구니가 되게 한 곳이다.물론 아난의 간청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여성도 세존의 가르침에 따라서 수행한다면 남성과 똑같이 깨달음에 이를 수 있지 않습니까?"“아난이여,수행을 완성한다면 누구든지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느니라"“그렇다면 왜 마하파사파제님의 출가를 허락하지 않는 것입니까? 마하파사파제님은 어머니 마야부인이 돌아가시자 세존께 젖을 먹이신 분입니다.세존을 친아들처럼 정성을 다해 키운 분입니다. 

어찌 은혜를 잊으시려고 합니까?” 결국 부처님은 아난의 간절한 청을 받아들여 여성의 출가를 허락했다.  

어느새 중천의 해가 석양이 되어 기울고 있다.순례단은 깃을 접는 날 새처럼 다음 행선지를 향해 부처님의 체취를 흠뻑 적신 채 버스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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