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륜사

낙조가 비경을 이루는 천년가람 흥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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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불교초청 성지순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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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흥륜사 댓글 0건 조회 669회 작성일 08-07-21 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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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경. 천태산. 육조 선찰 남화사 성지순례 글

1997.6.16일 중국불교협의회 조박초 회장의 초청으로 한국불교대표자 20여명이 방문길에 오른다. 한국대표로는 계종총무원장 송월주 스님을 비롯한 각 종단대표들이 베이징공항에 내리자 중국불교 지도자들이 맞이 해준다.

중국불교협회 광제사=
광제사(廣濟寺)는 지금으로부터 8백 년 전 금나라 때 창건된 사찰로써 중국불교 협회가 있는 본부이다. 경내에는 10만권이 넘는 도서관이 있고, 1984년 베이징시가 이 절의 모든 불상을 문화재로 지정할 만큼 유서 깊은 사찰이다.

베이징=
북경 북경은 중화인민 공화국의 수도로서 행정문화의 중심이자 3 천년을 이어온 중국 역대왕조의 도읍지답게 현존하는 역사유적 박물관 그 자체이다.
B C 11세기는 연나라의 도읍지로 계성이라 불렀고, 10세기 요나라 때는 연경, 12세기 금나라 때는 중도, 명나라 청나라 때부터 북경(베이징)이라고 이름을 바꾸어 3천년 동안 중국대륙의 수도로 군림해 온 곳이다.

북경의 총면적은 1만 8천 평방키로 미터로 산지 면적은 2/3를 차지하고 있고 동남부는 광활한 평원으로 발해만과직접 연결되어 있다. 1949.10.1 중화인민 공화국이 발족하여 수도로 정한 후 국제정치의무대로서 하루가 다르게 도시가 발전 변모하고 있다.

베이징의 볼만한 곳으로는 자금성. 천안문. 명릉. 이화원 등이 있고, 가까운 외각에 세계의문화유산인 유명한 만리장성도 있다. 인구는 약 1천만 명이며, 북경을 상징하는 꽃으로 국화, 월계 두 가지이다.

만리장성 萬里長城=
광제사가 마련한 오찬공양 후 베이징 외각북쪽에 위치한 만리장성을 보기위해 간다.
만리장성은 고대 중국을 대표하는 건물이자, 중화 민족의 유구한 역사와 문화적 우수성을 과시하는 세계적인 문화유산이다.

이 장성은 산해 관에서 출발하여 발해만을 거쳐 북경과 산서 성을 지나 남쪽으로 황하 (黃河)를 건너 남서로 관통하여 실크로드의 하서회랑을 따라 올라가 감숙성 가욕관에 이르기까지 17개성과 자치구를 통과하는 장장 6, 400㎞가 넘는 인류역사상 최대 규모의 토목공사이다.

중국에서 처음 장성을 쌓기 시작한 것은 BC 7C경으로 당시 침입과 약탈을 일삼던 북방 유목민족들로부터 백성들의 재산과 인명을 보호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훗날 중원을 통일한 중국 최초의 황제 진시황은 제국의 경계를 확고히 하고, 북방 유목민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막대한 인력과 물력을 총동원하여 만리장성이라는 인류사에 길이 남을 역작을 만들어냈다.

북경 시내에서 서북쪽으로 약 70km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장성은 북경 인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다. 산 정상의 높이가 해발1, 015m에 이르는 만리장성은 사방이 훤히 보이는 넓은 시야와 북경 외각으로 연결되는 사통팔달의 교통 요지라는 뜻에서 그 같은 이름이 붙여지게 된 것이다.
현재 일반인들에게 등정이 허용되고 있는 만리장성은 1505년 명나라 때 중건된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쇼핑센터에 들려보니 칠보도자기와 황산을 비롯한 중국의 절경을 담은 그림들도 많다.

환영만찬 =
저녁에는 중국불교 조박초회장이 우리대표단을 위한 만찬을 마련했다. 조박초 회장은 오래 전부터 중국불교를 대표해온 실세로써 천하 명필이기도하다. 93세의 연세에도 보살처럼 인자하고 건강해 보인다.

[6월 17일] 주중대사와 오찬 =
아침 공양후 우리대표단을 초청해준 종교국을 방문하여 중국 종교정책에관한 설명을 들고, 정종욱주중 한국대사가 마련한 오찬을 받으면서 한중간의 교류와 북한에 관한 설명을 듣는 자리를 갖는다. 천안문(天安門)광장=
오후에는 자금성이 있는 천안문 광장을 보기위해간다. 천안문광장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상징이다. 본래 북경에는 내성 외성이 있었으나 청나라 때 내성에는 지배계층인 만주족과, 외성에는 피지배층인 한족이 살았다.

황제는 황성안의 자금성에 살았으나 지금은 내성외성의 흔적만 남아있고 황성은 천안문만 남아 있다. 천안문은 1 417년부터 하늘의 뜻을 받들어 천하를 편안하게 한다는 뜻으로 승천문이라 부르다가 청대에 개축 하면서 천안문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자금성(紫禁城) 자금성은 중국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완전한 궁전이다. 이 궁성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영화 마지막 황제를 통해서다. 자금성의 자 (紫란 천자를 이름이고. 금성禁城이란 별자리란 뜻으로 곧 천자의 궁성이란 뜻이다.

명나라 초기 (1406~1420)14년에 걸쳐 건축된 자금성은 8백여 개의 궁전과9천여 개의 방이 있는 엄청난 규모의 궁전이다. 천안문은 천안문 사태로 더욱 유명하다. 1980. 4월 중국 전 총서기이자 개혁가였던 후야오방 胡耀邦의 죽음이 계기가 되어 민주화 운동이 시작되었다.

처음 시작한 학생들의 시위가 점차 많은 시민으로 번지게 되자 여기에 위기감을 느낀 덩샤오핑(鄧小平)은 같은 해 6월 4일 데모군중들에게 기관총을 난사하며 탱크와 무력으로 강제진압을 시켰다. 이 과정에서 중국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죽음을 당한 이후부터 천안문은 중국민주주의의 상징처럼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화원=
베이징외각 있는 이화원은 중국3대 정원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총 8키로 둘레의 곤명호(昆明湖)와 만수산(萬壽山)과 천간낭하(千間廊下) 장랑 (長廊)을 비롯한 수많은 전각들 하나 하나마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는 이화원은 12세기 금나라 때부터 역대 중국 황실의 휴양지로 만들어 졌다.

특히 청나라 말기 섭정을 맡았던 서태후가 1885년부터 약10년 동안 군비증가용 차관까지 전용해 보수공사를 강행하는 바람에 중일전쟁의 패배의 원인을 재공 하는 원성의 대상이 됐던 곳이다. 그러나 지금은 년 간 수백만 명의 국내외 관광객들의 사랑받고, 황금 알을 낳는 명소로 각광받고 있다.

면적은 87만 7천 평으로 며칠을 구경해도 다볼 수 없을 정도로 커고 3/4를 차지하는 곤명호는 육지속의 호수로 이를 만큼 항주 서호의 소제(蘇堤)를 모방하여 만든 것이다.

[6월18일] 남경 방문=
3일째를 맞아 국내선을 타고 강서성의 성도 成都 남경南京으로 간다. 중국의 사대도 (낙양. 북경. 서안.)중의 하나인 남경은 진나라 진시황 때 건설된 오나라수도였다. 인구 60만 명으로 동해안에 자리하여 6.300km나 되는 양자강 남쪽에 위치한 도시로 옛날 불교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던 곳이다.

남경의 명승지로는. 각경처와, 농부출신으로 명나라를 세운 명태조 주원장의 능, 중국혁명의 아버지요, 정신적 지주로 불리던 중산(中山) 손 문(孫 文) 선생의 능을 비롯한 서하사와 영곡사가 있기도 하다.

각경처 刻經處=
각경처는 양인산(楊仁山)거사가 세웠다고 하는 각경처[장경사藏經寺] 책임자 서위주임은 각경처의 유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해 준다. “거사는 본래 불교와는 인연이 없든 사람이었다. 젊은 시절 전신이 마비되는 불치의 병을 얻어 방에 누워 절망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어느 날 병문안을 온 친구가“어쩌다 자네가 이러한 몹쓸병에 걸렸단 말인가? 좋은 책이니 많이 읽으면 병마와 싸우고 있는 자네에게 힘이 되어줄 걸세“ 하면서 책 한권을 주고 갔다고 한다. 하구한날 방에 누워서 친구가 주고 간 그 책만 읽었는데 어느 날 희한하게도 병이다 낫게 되었다고 한다.

양인산은 그때서야 이 책이 불경(佛經)임을 깨닫고 부처님에 대한 보은으로 자신처럼 병고를 앓는 사람들을 위하여 사재를 털어 경전을 만드는 각경처를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칼끝에 정성을 모아 한자 한자 부처님 경전을 새기고, 그 목판의 활자를 책으로 만들어 중국전역의 불자들에게 보시하는 보살행의 현장 이다.

손 문 능 =
손 문 선생이 1926년 서거하자 1929년까지 3년의 공사 끝에 완공한 증산 능 까지는 총392개의 돌계단을 밟고 올라 가야한다. 능문에는 손 문 선생이 쓴 천하위공(天下爲公)이란 글이 있고, 묘실을 둘러보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아름다운 고도 남경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는 명당으로 보인다.

영곡사=
유서 깊은 영곡사는 541년에 창건한 고찰로서 60m나 되는 높은 영곡 탑에 올라가 굽이쳐 흐르는 양자강을 바로보고 있노라니 마치 승천하는 용을 보는 듯하다. 주원장의 묘 영곡사에서 차를 타고 주원장의 능을 찾는다.

그런데 능은 보이지 않고 허술한 야산에 무성한 잡초만이 우거져 있다.“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이란 황제의 무덤치고는 너무나 허술해 보인다“ 고하자 ”유해의 도굴을 막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해놓은 것“이라는 설명이다.

남경학살기념 탑=
얼마 떨어지지 않는 거리에 남경대학살의 넋을 기리는 추모 탑이 서있다. 남경대학살사건은 일본군이 1937.12.13일 6주 만에 남경을 점령하고 노인부녀자할 것 없이 30만 명을 참혹하게 학살한 현장에 그때의 참상을 "잊지 말라" 는 기념관이다.

서하고사棲霞古寺=
서하사는 중국에서도 유서 깊은 선종 사찰로서 수많은 승려들을 교육하는 불교승가대학이 있는 절이다. 대학의 시설과 교육의 현장을 돌아본 뒤 총장스님으로부터 중국불교의 미래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다과를 나누고 기념촬영을 갖는다.

[6월 19일] 구화산 九華山 =
남경을 출발하여 5시간 만에 안휘성 구화산 취룡호텔에 도착한다. 해발1300m의 산길을 오르는 동안 10분이 멀다하고 해와 구름이 교차하는 기상을 보인다.
숙소에 짐을 풀기가 바쁘게 구화산의 종정 .인덕 仁德장로가 수행하는 기원사의 환영법회에 참석하여 양국간의 상호관심사를 논의하고 개산조 김교각開山祖 金橋角스님에 대한 고행과 행적에 관한 말씀을 듣는다.

1천3백 년 전 신라의 왕자였던 김교각 스님은 자신의 신분을 버리고 당나라로 건너와 지장이란 법명으로 출가하여 중국대륙을 두루 돌며 구도수행을 하다가 양자강 남쪽 구화산의 동굴에서 깨달음을 얻은 뒤 화성사를 창건하고 제자들과 함께 구화산을 지장도 량으로 만들고 지장신앙을 전파하였다.

당시 중국 사람들에게는 생소하였던 지장신앙을 널리 전파해 구화산을 중국사대 불교성지중의 하나로 자리 잡게 한분이다. 특히 김교각 스님은 99세에 열반한지 3년 뒤 생전의 예언대로 지장보살로 화신하는 등신불이 되어 오늘날까지 13억 중국인들에게 절대적인 신앙의 대상인 생불로 존경받고 있다.

구화산성지에는 기원정사를 비롯하여 50여 사찰이 있고, 6백여 명의 스님들이 수행하고 있는 대성지이며 1만 명이 넘는 불자들이 도읍을 이루고 생활하는 도량이다. 이는 천3백 년 전의 김교각 지장생불의 법력이 현재까지 감응되고 있다는 증거이다.

저녁이 되자 안휘성 양다량楊多良 성장을 비롯한 관계자들과 인덕종정스님과 지장사 주지 성부스님을 비롯한 안휘 성 불교 간부스님들이 환영만찬을 마련해 준다. [6월20일] 김교각 등신불참배 오늘은 먼저 김교각 지장보살의 등신불이 안치된 지장사 참배를 위해 출발을 한다.

1천3백 년 전 김교각스님은 체은이라는 흰 삽살개 한 마리를 대리고 구화산에 와서 초근목피로 수행으로 생불 지장보살이 되어 이절 월신 보전에 산부처로 앉아 계신다. 김교각 스님이 구화산을 지장도량으로 삼게 된 인연은, 체은 이라는 삽살개 한 마리를 상좌처럼 앞세우고 다였다 고한다,

희한하게도 다른 곳은 다 싫다하고 구화산에 이르자 꼬리를 흔들며 떠나려하지 않아 이곳을 수행 처로 정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체은이라는 삽살개는 문수보살의 화현이고, 김교각지장보살은 말세중생의 제도를 위해 이 세상에오신(취의원정 시상사문(취衣圓頂 示相沙門)하는 지장보살임을 얼른 짐작케 한다.

화성사 참배 화성사는 김교각 스님의 법손(法孫) 자명(慈明)대사의 등신불이 안치되어있는 절이다. 자명선사는 김교각 생불을 친견하러 온 사람들이 그냥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자신이 대신하겠다는 원력을 세우고 수행한 끝에 생불이 되어 누구나 화성사에 오면 등신불을 친견할 수 있도록 항상 앉자있는 절이다.

구화산 벼경대 케이블카를 타고 구화산 정상에 오르자 깎아지른 바위산에 천상에서 떨어지다가 걸려서 매어달린 듯 한 배경 대에 천태사가 있다. 여기가 바로 김교각 스님이 구화 산에 와서 참선하고 수행하시던 절이다. 참배를 올리고 산세를 살펴보니 환희심이 절로 나온다. 깎아지른 바위들이 하늘높이 우뚝우뚝 서 있고, 산허리를 감고 도는 운해의 요동은 승천하는 용의 모습같이 보인다.

[3월 21일] 절강성 항주=
구화산 참배를 마치고 버스에 올라 7시간만에 항주에 이른다. 중국의 6대고도 중의 하나인 항주는 청산록수 사부다향[淸山綠水 絲府茶鄕] 푸른 산 맑은 물이 있고, 실크와 차로 유명한 인구450만의 아름답고 유서 깊은 도시이다.

[6월22일] 천태산 국청사 참배=
아침부터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어 무슨 일을 낼 것만 같은 날씨다. 아니나 다를까 중도에 억수 같은 장대비를 만나 도로가 끊기고, 산사태가 길을 가로막아 하는 수없이 성한 길을 찾아 돌고 돌아서 가는데 불귀의 혼이 될지도 모를 위험한 구간이 한 두 곳이 아니다.

본래 대로라면 항주에서 국청사까지는 그다지 먼 길이 아니지만 천신만고를 격어면서 5시간 만에 국청사에 도착한다. 오늘밤 묶게 될 숙소는 계곡물이 힘차게 흐르고 숲이 우거진 깊은 산속 산장이다. 정해진 일정이라 지자대사의 등신보탑을 친견해야 하는데 도무지 비가 그치지 않는다.

그렇다고 여까지 와서 생불이나 다름없는 지자대사의 등신보탑친견을 포기할 수도 없는 일이다. 조금 무리하다는 생각을 가지면서도 비닐우산을 바쳐 들고 길을 나선다. 지자대사 보탑 지자대사의 보탑은 해발 1천M의 천태산 정상 가까이 있다. 바람을 동반한 줄기찬 빗줄기를 맞으며 기를 쓰고 올라가느라 모두가 물귀신처럼 보인다.

대사의 등신이 안치된 보탑에 참배를 올리고 나니 생불을 친견하는 듯 보람과 기쁨으로 가득 차오른다. 하지만 오랫동안 방치해 두었던 탓으로 절이 퇴락하고, 도량은 잡초로 무성하여 지난 수십 년간 중국불교의 아픔과 침체를 보는듯하여 마음이 아프다.

하산할 때는 다행히 비가 그치고 날이 개여 고산이 뿜어내는 운해의 선경과 아름다운 천태 산의 자태를 마음껏 바라보고 느낄 수 있다. 밤이 되자 적막으로 가득한 산장 곁의 물론에서는 개구리들의 합창소리가 고요한 심산의 정적을 깨트린다.

저들이 무슨 그리움이 얼마나 많기에 저렇게 울어댄다는 말인가? 멀리서 온 나를 반기는 소리인가, 지자대사가 설해준 법 법화경을 읽는 소리인가, 쉼 없이 울어대는 열창의 하모니가 더없이 애절하고 간절하게만 들려온다.

[6월 23일] 국청사 참배
날이 밝아오자 그토록 울어대던 개구리들의 소리는 멈추고 방문 앞 나무가지 위에서 새들이 지져대는 소리가 새로운 아침을 알린다. 이들과 짧은 만남의 소중한 인연에 감사하는 금강경한편을 읽는다.

오늘 사시에는 천태 지자대사가 창건한 국청사에서 우리대표단을 위한 오찬을 대접한다하여 방문한다. 천태(천태)란 본래 산 이름이다. 이 산은 중국 절강성 태주부에 위치하는 곳으로 천태 지자대사(天台 智者大師)가 538년부터-597까지 여기서 수행한 이후로 불교의성지가 되었다.

대사가 50세에 금릉의 광택사에서 법화경강설과, 56세 때 형주 옥천사에서 묘법연화경 5자를 강론한 것과, 다음해 4월 같은 절에서 법화의 관심수행을 강의 한 것이 각각<법화문구> <법화현의> <마하지관>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법화3부 또는 천태 3부라고 일컬어지는 천태종의 중심사상이다. 천태지자 대사는 천태종의 시조이다.

국청사는 바로 수나라 때 천태대사가 창건 한 절이다. 절 입구에 이르자 주지 가명 (可明)장로를 비롯한 많은 스님들이 대표단을 맞이 해준다. 그러나 이곳에도 모택동의 종교 법난의 흔적이 여기저기서 보인다. 국청사의 오찬공양을 받고 버스 편으로 영은사 참배를 위해 항주로 출발한다.

항주 영은사 참배=
영은사는 인구450만을 가진 항주시에서 그리 멀지 않는 위치에 있는 절이다. 1백만 평의 경내를 가진 대찰로써 매일 1만 명이 넘는 참배객들이 찾는 시민의 공원이자 부처님의 도량이다. 영은사는 1660년 인도승려 혜리대사가 창건한 절이다.

참배를 올리기 위해 대웅전 앞에 이르자 참배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고, 도량에는 불자들이 공양올린 향연기가 운무처럼 가득하다. 저녁에는 영은사 주지 근원(根源)스님을 비롯한 항주불교 지도자들과 절강성 항주인민 국장이 주최하는 환영만찬을 받고, 먼 길 떠날 내일을 생각하여 일찍 잠자리에 든다.

[3월 24일] 항주 서호=
오늘 오후 소관으로 가기에 앞서 항주의 서호를 찾았다. 절강성의 성도인 항주의 총면적은 683평방키로 미터이고 중국의 10대명승지중의 하나이다. 그래서 항주는 고래로부터 이름난 문인들이 많이 나온 곳이 기도하다.

전당강 하류의 북쪽과 경향대운하의 남단에 위치하여 상해와의 거리는 200km로 고속버스로 2시간이면 오갈 수 있는 곳이다. 예로부터 중국 사람들은 “ 하늘에는 극락이 있고, 땅에는 소주와 항주가 있다(上有極樂 下有蘇杭)는 칭찬에 걸맞게 년 간 2천만 명의 관광객들이 항주를 찾는다.

서호는 항주의 서쪽에 있다하여 서호[西湖]라 이름 한다. 13억 중국인들은 서호를 말하길“아침에도 좋고. 저녁에도 좋고, 비가와도 좋고, 눈이 내려도 좋고, 사계절 어느 때나 다 좋다“ 할 만큼 서 호를 극찬한다. 오후2시 항주에서 국내선항공기로 광동성 광주廣州 공항에도착한 한다.

여기서 소형 버스에 몸을 싣고, 칠흑같이 어두운 밤길의 비포장도로를 끝없이 가고 있다. 비가 얼마나 쏟아지는지 버스가 진흙수렁에 빠지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이때 마다 내려서 빠진 버스를 끌어내느라 억수 같은 비 속에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힘이들고 지쳐서 모두가 초죽음의 상태이다.

1천 3백 년 전 신라의 혜초스님이 수만리 천축 길을 걸어서 다녀왔고, 당나라 현장법사는 인도구법을 하셨는데, 라는 생각을 가지니 견딜 만하다. 이렇게 12시간의 고행 끝에 중국의 남쪽 적은도시 육조스님의 법향이 그윽한 소관에 도착하여 숙소에 드니 새벽4시가 넘는다.

[6월 25일] 소관시 남화사 참배=
새벽 4시가 넘어서 잠자리에 든 관계로 아침9시 남화사 南華寺 참배를 위해 늦으감치 출발한다. 남화사는 버스로 약 30분 거리였다. 절 입구에 이르자 방장스님을 비롯한 수많은 불자들이 환영 해준다.

남화사는 선을 크게 중흥시킨 육조 혜능六祖 慧能 대사의 육신보탑이 안치되어 있는 절이고, 대사께서 선풍禪風을 더 날리며 수많은 선지식을 배출시킨 불교사에 빛나는 전통 선禪을 뿌리를 내리게 한 역사의 현장이다.

오늘날 한국불교의 조계종이라는 이름은 육조 혜능 대사가 선풍을 더 날리던 보림사 앞을 유유히 흐르는 조계강의 이름에서 유래 된 것이니 이는 육조대사의 전통선풍을 이어받는 수행 승단이라는 뜻이다. 오늘 참배하는 남화사는 정통선의 고향이자 많은 의미를 갖게하는 절이었다.

경내에 들서자 불자들이 피어올린 향연기가 운무를 이루고, 학승들의 독경소리가 산문을 울린다. 법당에 참배를 드리고 육조대사의 진신을 모신탑에 감격스런 삼배의 인사를 올린다.

광주 광효사 참배=
수행에 많은 도움이 되는 남화사 참배를 마치고 버스에 올라 저녁 7시 광동성 광주에 도착 한다. 오늘 저녁공양은 육조스님의 수계본사인 광효사 주지 신성新成 스님과 광동성 불교협회 스님들이 중국방문을 회향만찬을 마련해 준다.

[6월 26일] 홍콩경유 귀국=
중국불교성지 순례를 마치고 양국불교 간의 우의증진과 21세기의 세계평화와 번영을 위해 공동으로 노력하자“는 다짐을 채택하고 열차 편으로 심천을 거쳐 오전 11시경 홍콩에 도착한다. 홍콩은 본토말로 샹강[香港]이다.

광둥성[廣東省]남쪽 해안 지대에 위치한 특별행정구역으로서 과거 백년 동안은 영국 식민지였으나 1997년 7월 중국으로 반환 되었다. 본토 주룽반도[九龍半島]와 란터우 섬을 비롯한 230개가 넘는 섬들로 이루어져있다.

남북길이는 43km이고 동서길이는 56km이다. 인구의 90%가 불교도이고, 힌두교 이슬람 그리스도교들은 아주 소수이다. 금융업과 국제무역에 기반을 둔 시장경제를 유지하며, 일인당 국민소득은 아시아 최고이다. 1980년까지 경제성장의 주요 견인차는 경공업이었으나 이후 서비스 분야가 점차 경제기반을 장악하게 되었다.

홍콩에는 훌륭한 항구시설이 갖추어져 있고, 세계최대 규모의 컨테이너 하역장과, 카이탁 공항에는 수십 개의 항공사들이 취항하고 있는 세계로 통하는 하늘과 바다의 길목이다. 빅토리아 홍콩에 도착하여 빅토리아 피크를 보기위해서 간다. 이곳은 홍콩을 찾는 사람이면 누구나 한번 씩은 들리는 명소이다.

넓은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고, 홍콩이 자랑하는 현란한 야경을 감상할 수 있고, 구미를 당기는 레스토랑과, 좋은 물건들이 진열된 갤러리들이 사람들의 발길을 끌어 드리고 있다. 윙 타이신 사원 이번 순례를 회향으로 홍콩시내의 윙 타이신 사찰을 참배한다. 이 사원은 홍콩에서도 가장 많은 불자들이 찾는 곳으로 1921년 독실한 불자가 단독으로 세웠다고 한다.

도심사원치고 규모도 대단하지만 참배를 올리는 불자들의 행렬이 인산인해를 이룬다. 윙 타이신 사원참배를 끝으로 찬란한 등불이 홍콩의 밤을 밝히는 저녁시간 귀국길에 오른다. 항공기가 이륙하자 모두들 곤한 단잠에 들고 만다.

이번 순례에서 보고 느낀 일들을 정리하는 동안 "김포공항에 도착 했다" 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온다. 이번 중국불교순방은 참으로 얻고 배운 것이 많다. 광동 성의 남화사와 천태 산 국청사 참배는 개인적으로 참배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좋은 기회를 준 중국불교 조박초회장님께 손 모아 감사드린다.

글 흥 륜 사 주 지 정 법 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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