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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성지순례 (죽림정사. 나란다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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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흥륜사 댓글 0건 조회 477회 작성일 16-04-18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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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성지순례 (죽림정사. 나란다대학) 

죽림정사竹林精舍 


죽림정사에서 북쪽으로 2km쯤 떨어진 곳에 빔비사라 왕이 다스리던 왕사성 터가 있다.부처님이 1천 명의 제자들을 데리고 왕사성에 오셔서 처음은 장림(杖林)이란 숲에서 수행하고 계셨다. 빔비사라왕은  장림으로 달려가서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감격하여"칼란다 "장자의 소유인 죽림원을 사서 절을 지은 다음 부처님이 제자들과 오랫동안 머무시며 수행하실 수 있도록 시주를 하였으니 바로 죽림정사이다.이는 교단이 생긴 이래 기원정사 다음으로 두 번째 절이다.죽림정사 터 동쪽에 서있는 탑은“아쟈타사투루“대왕이 부처님의 진신 사리를 안치한 탑이다


라즈기르는 왕이 사는 성이라 하여 유래된 지명이다, 부처님 당시,강력한 군주 국가였던 마가다국의 수도가 라자그라하(왕사성)이다. 광활한 대지에서는 보기 드물게 산맥이 솟아있는 왕사성은 다섯 봉우리가 둘러싸인 천연요새로서 부처님 당시에는 북인도 16개국 중 강력한 군주국가인 마가다국의 수도로서 구성과 신성으로 나뉘어 있었다,구도자의 신분으로 이곳을 찾은 싯다르타 보살은 우드라카 라마풋다 수행자로부터 비상비비상처의 가르침을 받기도 하였으나 그것은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 아님을 깨닫고 붓다가야로 발길을 돌렸던 곳이다.


깨달음을 증득한 뒤 우루빌라가섭3형제와 천명의 제자를 이끌고 다시 이곳을 찾아온 부처님은 대중들에게 널리 법을 펼치신 장소이다. 죽림정사와 가까운 거리에 영취산 이 있었고,부처님 열반 후 첫번째 경전결집이 행하여지는 등 불교가 매우 번성한 장소였으나 ,아자타사트루 왕의 아들 우다인(bc 459~43)이 파트나로 천도하면서 그 활기를 잃게되어 오늘날 한적한 대나무 숲속에 묻히고 말았다, 

이 언덕의 북 쪽으로 가면 카란다장자의 이름을 붙인 카란다 연못이 있다.현장은 "여래께서 이곳에서 설법을 많이 하셨다, 물은 맑고 팔공 덕을 갖추고 있었으나, 여래의 열반 후 말라버렸다고 전한다.

 

불교의 요람 나란다대학

그 옛날 나란다 대학은 세계 최고의 불교명문 상아탑이었다. 교정의 크기가 가로 11km, 세로 5km였던 나란다 대학은 1199년 무슬림의 침공으로 파괴돼 황폐한 터만 남았다. 그릇된 종교관이 빚어낸 아픈 역사의 상징이다. 

“라즈기르“는 아쇼까왕과 인연이 깊은 곳이다. 마가다국의 수도였던 라즈기르 한자로는 왕사성(王舍城)이다. 이 지역에는 아쇼카왕이 세운 탑파가 여러 개 있고 11km 떨어진 나란다에 아쇼카왕이 세운 사원이 있다. 그 사원이 큰 승가람으로 번성하여 후에 나란다대학이 된 것이다 .현장은 물론 우리나라 많은 고승들도 공부했던 대학이기도 하다. 


나란다 마을은 사리불 존자의 고향이고,  그래서 날란다에는 사리불 탑파가 서 있다. 사리불은 부처님께 나가 법을 청하여 들었다.부처님은 그가 세연이 다 되어 떠날 것을 아시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설법을 해주셨다. 사리불은 즉시 나란다 마을로 가서 마을사람들에게 설법을 한 뒤 조용히 눈을 감았다.이날 목련도 나란다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그의 고향마을로 돌아가 입적했다. 


출가도 같이 하고, 깨달음도 같이 얻고, 입적도 같이 한 사례가 또 있을까.서로를 존경하고 아끼면서 불교승단을 헌신적으로 이끌었던 그들의 우정에 그저 고개가 숙여질 뿐이다.

나란다대학을 거쳐 간 고승으로 용수(龍樹)를 빼놓을 수 없다.그는 7살 어린 나이로 나란다대학에 들어와 공부하여 나중에 고승이 된 인물이다. 그리고 5세기경에 유식학을 완성한 무착(無着) 세친(世親) 등도 날란다대학을 빛낸 고승이다.


나란다대학이 번성한 시기는 5~6세기경 굽타왕조와 하르샤왕조(606-648)때 최고 전성기를 누렸다.우리나라 의정(義淨)스님도 나란다대학에서 유학으로 공부를 하였고, 신라 “아리야발마”와 혜업(慧業)도  오랫 동안 나란다대학에 입학하여 공부를 하였다고 현장의 <대당서역기>에 나온다. 당시는 나란다대학에 다니는 것만으로도 세상의 존경을 받았다.


그런데 그 찬란했던 옛 영광과 위용은 온데간데없고, 대지위에 말없이 길게누워있어 내 마음을 안타깝고 아프게 한다.

한때는 5만명이 넘는 스님들이 주야로 부처님의 진리를 탐구하던 곳이었는데,지금은 무심한 풀 더미에 뒤덮여 세월을 견뎌가고 있기 때문이다.현장법사가 이 대학에 와서 수학하던 7세기 중반까지도 1만 명이 넘는 스님들이 불타의 진리를 연구하던 곳 이었는데 어찌 이토록 황량하여 있다는 말인가? 

1199년 나란다대학은 무슬림이 침공하여 방화와 살육으로 거대한 켐퍼스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세월의 수레바퀴는 쉼 없이 굴러,불태운 자도,불에 태워 진자도 남지 않은 원점으로 돌아와 있다.그러나 나란다 대학이 언젠가는 잡초더미를 딛고 일어나,부처님 진리의 메아리를 울려주게 될 날을 간절히 기원하며 나란다 대학을 뒤로하고 바이샬리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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