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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성지순례 (최초의 불탑 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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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흥륜사 댓글 0건 조회 420회 작성일 16-04-18 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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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성지순례 (최초의 불탑 산치) 

인도 중부의 산치 대탑 


뉴델리 역에서 열차를 타면 보팔까지 8시간이 걸리고,보팔에서 산치까지는 버스로 1시간 걸린다.인도 불적지 순례의 시효로 알려진  현장(玄壯)스님조차 산치대탑에 대한 언급이 한마디 없는 것을 보면 그냥 지나친 듯하다.

보통 순례자들은 짧은 일정 때문에 산치대탑까지 친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는 인도 불적지 두 번째 순례를 앞두고 반드시 산치대탑을 참배하겠다는 원력을 세웠기에 드디어 참배하게 된다.


산치대탑은 기원전 3세기 높이16.5m 기단부 지름 37m,인도 중부 아쇼카 대왕이 정복 전쟁을 전개하면서 불교를 전파시켰고, 인도 각지에 부처님 진신 사리를 모시기 위하여 불탑을 세웠다.  

탑은 불상과 함께 불교신앙의 중심이다. 탑은 석가모니의 상징으로 불상보다 먼저 만들어졌다. 본래는 부처님의 진신 사리를 모신 탑을 세웠으나 불교가 널리 전파되고 많은 탑이 조성됨에 따라 불경 등 법신사리를 대신 모시기도 하였다. 

각국마다 탑의 모양은 다르다. 산치대탑은 기원전 3세기경 아쇼카 대왕 때 불교 중심지였던  산치에 세워져 거대하고 장엄할 뿐만 아니라 4대 탑문과 주위 난간의 조각들은 인도불교  조각예술의 백미로 일컬어지고 있으며 산치가 불탑의 기원이다. 우리나라 다보탑과 석가탑의 고향도 바로 여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 산치대탑을 세운 아쇼카대왕은 수천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법왕”이라는 칭송을 받고 있다.하지만, 그가 불교에 귀의하게 된 동기는 왕위에 오르는 과정과 거대한 인도대륙을 최초로 통일하면서 많은 피를 뿌린 왕이었다. 그래서 화해를 빌고 인과에 대한 참회의 뜻으로 자비와 덕성을 지닌 부처님 경전을 백성에 전파하고 팔만사천의 불탑을 인도 전역에 세웠을 것으로 생각해 본다.


아쇼카의 부친 빈두사라 왕에게는 101명의 자식이 있었다. 아쇼카는 그 중 가장 명민하고  많은 사람들이 따르고 있어 아버지는 강력한 힘을 가진 아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빈두사라왕은  아쇼카에게  반란 진압군의  총사령관을 맡겼으나 “어떤 무기도 사용하지 말라”는 명령을 하였다. 이는 곧 죽어버리라는 말과 같았다.

그러나 아쇼카는 이 불가능해 보이는 임무를 기적처럼 완수하고 금의환향하였다. 이를 본 빈두사라 왕은 죽으라고 보낸 아들이 살아 온 것에 화병이 났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갑자기 죽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승기를 잡은 아쇼카는 99명의 형제를 제거하고,왕자들을 따르던 신하와 궁녀들까지 모두 처형했다. 그 피바다 속에서 아쇼카의 칼을 피해 출가한 막내 동생 단 한 명만 살아남았다.그렇게 왕좌에 오른 아쇼카는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정복전쟁을 펼쳤고 마침내 인도 통일의 대업을 달성했다. 


수많은 생명이 살아져가는 피비린내 위에 제국을  세웠지만  고통과 회한이 아쇼카를 엄습하였다. 그때 손을 내민 이가 있었으니, 바로 유일하게 살아남아 출가했던 막내 동생이었다. 그의 제도로 아쇼카는  불교에 귀의하게 되었고, 자신이 행한 인과를 해원하고 참회하기 위해 인도 전역에 법등을 밝히며, 바위마다 “생명을 죽이지 말라”는 가르침을 새겼다. 

그리고 부처님 입멸 후 봉안했던 여덟 탑파 중 8번 탑을 해체하여 사리를 나누어  인도 전역에 8만여 기의 불탑을 세웠으니 그 가운데 하나가 산치대탑이다.


산치대탑에는 아린 사연이 베여있다. 아쇼카는 젊은 시절 비데샤 지방의 “데비”라는 여인을 사랑했다. 왕이 되기 전 둘 사이에서는 남매가 태어났다. 그러나 아쇼카는  전장으로 떠나야 했고, 그 후 왕위에 오르면서 수십년이 흐르도록 젊은 시절 에 사랑했던 여인을 까맣게 있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쇼카가 데비에게 남겨주었던 신표를 들고 청년이 된 아들이 찾아왔다. 옛 사랑을 떠올린 아쇼카는 비데샤로 달려갔지만 이미 데비는 죽고 이 세상에 없었다. 


“부처님 곁에 묻히고 싶어했다.“는 데비의 소원에 따라 그녀의 고향 비데샤에서 가까운 언덕 위에 진신사리를 봉안한 스투파를 조성했다. 그리고 다시 찾은 남매는 출가하여 남방 (스리랑카)에 최초로 불교를 전한 “마힌다”스님이 아들이고, 인도 붓다가야의 보리수를  스리랑카 보리사에 분양해 심은 상가미타 비구니 스님이 아쇼가 대왕의 딸이다. 

산치대탑은 “사랑의 탑”이라 불린다.산치대탑이 인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탑으로 손꼽히는 이유도 이처럼 애틋한 사연이 베여있기 때문이다.

 

1번 대탑이 아쇼카왕이 데비를 위해 세운 진신 사리탑이고, 3번 대탑에는 부처님의 제자  사리불과 마하목건련의 사리가 봉안되어 있다고 한다. 영국 식민지배 시기에 사리를 가져가 대영박물관에  전시하는 부침을 겪기도 했으나 독립 후인 1953년 반환되어 지금은 바로 옆 새로 지은 사원에 안치돼 있다.

2번 탑은 언덕 아래 조금 떨어진 곳에 있다. 규모는 조금 작지만, 조각이 아름답고,불탑주변 곳곳에는 승원이나 불당 벽과 기둥뿐들이 널리 산재해 있어 큰 규모의 사원이었음을 말해준다.


사랑했던 사람과 헤어져 기약 없는 기다림 속에 생을 마감했던 여인 데비의 마지막 소원은 아쇼카와의 재회가 아니었다. 

만남은 반드시 헤어짐을 낳고 헤어진 이들은 언젠가 다시 만난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녀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녀의 마지막 소원은 부처님 곁에 묻히는 것이었고 부처님의 가르침 안에서 아쇼카의 사랑은 수 천 년이 지나도록 그녀 곁에 머물고 있다. 또한 그의 아들,딸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다 건너 멀리까지 전하는 전법의 횃불이 되었다.산치에는 부처님 가르침의 위대함이, 그리고 사랑의 아름다움이 따뜻한 햇살처럼 가득 고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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