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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 순례기 (고창고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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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흥륜사 댓글 0건 조회 395회 작성일 16-04-18 2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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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실크로드 순례기 (고창고성 )
고창고성(高昌古城)은 투르판에서 남동쪽으로 30㎞ 거리며,화염산과 천불동에서는 약15㎞ 떨어진 곳에 있다.“투르판 문서"라 불리는 아스타나 고성 (고창고성)에 이르자,넓은 사막을 불에 달궈 놓은 듯 엄청 뜨겁다.매표소에서 입장권을 구입한 후 나귀 수레에 오르자, 성안으로 한참동안 달려서 들어간다. 

고창고성 이전에 토번 (현재의 투루판)에는 차사전국 (교하고성)이 번성하는 왕국을 누리고 있었다.그런데 차사전국이 흉노족과 합세하여 한나라를 치려다가 한나라 20만 대군에 의해 <450년> 하루아침에 멸망하고 만다. 
그 후 차사전국을 함락시킨 한나라 (북위 효문제 497년)의 국문태가 지세가 더 높고,백성이 잘됨으로 인하여 이름을 날리며번창하라.(地勢高敞. 人庶昌盛. 因名高昌)”는 글을 성벽에 새기며 고창도읍을 새웠다.

고창고성의 성벽은 흙으로 쌓아졌지만, 강우량이 적고 건조한 지역이라 지금까지도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성의 두께가 12m, 성벽의 높이가 11.5m요, 둘레가 5.4km로 사방 12개의 문이 있을 정도로 실크로드 유적 중에서 가장 크다. 
 성의 구조는 외성, 내성, 궁성 등으로 나누어져 있어 당나라 도읍지인 장안을 연상시켰다.전성기 때는 인구 8만 명에 승려 8,000명이 수행하고 있었다고 한다. 성내에는 사찰, 왕궁,시장. 거주지 등이 있었는데,그중 불교사원이 30여개가 넘었다고 한다.
 고창국은 지리적으로 서쪽으로는 투르크족과 경계를 이루고 있었고,동편으로는 중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 그래서 고창국은 항상 불안했다. 그런데, 고창국이 투르크족과 가깝다는 것을 안 당 태종이 서역 정벌에 나서 고창국을 치게 된다. 
고창국의 왕은 당태종 이세민이 고창국을 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충격을 받아 죽게 되면서, 160년 번성을 누리던 고창왕국은 결국 멸망하여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이 성이 유명하게 된 것은 진관 2년(630)서역으로 가던 현장법사가 한 달 동안 이곳에 체류하면서 법을 전하였기 때문이다. 
현장은 서역의 구법을 위해 629년 장안을 출발하여 구사일생으로 (이오국) 현재의 하미에 도착하였다.이 때 마침 고창국의 사자가 하미에 와 있다가 현장법사를 친견하고 인품에 감동하여 경모하게 된다.

사자가 얼른 본국으로 돌아가 불심이 깊은 국왕 (국문태)에게 보고하자, 왕은 준마 수십 필과  마차를 준비하여 현장법사를 모실 환영사절을 보냈다. 현장법사는 원래 고창국을 거치지 않고 서역으로 가려 했으나, 고창국왕의 간절한 청을 뿌리칠 수 없어 고창으로 향하였다. 

현장법사가 고창국에 도착하자, 고창국왕 국문태는  직접 횃불을 든  시종을 거느리고 달려 나와  스님을 맞이했다고 한다. 
그리고 현장법사가 설법 단에 오를 때는 국왕이 엎드려 자신의 어깨를 발판으로 삼아 법상에 오르도록 했다는 대목만 보더라도 국왕의 불심이 얼마나 장하였는가를 짐작할 만하다. 

왕과 왕비는 현장법사를 극진히 모시면서 설법을 듣고 배우기를 원했다.왕은 그가 서역으로 가지 않고 이곳에 오래 머물러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현장법사는 단식까지  하면서 이 제의를 거절했고,서역에서 돌아 올 때 다시 들린다는 조건으로 고창고성을 떠났다. 
 
국왕은 또 스님이 성을 떠나는 날도 성내의 모든 승려와 백성들이 스님을 전송토록 했고 왕 스스로 직접 수십리 까지 나가 현장법사를 전송하였다.그리고 먼 길을 떠나는 법사에게 서역 어느 나라도 출입할 수 있는 통행증과 구법에 필요한 여비를 제공하였다.
현장법사는 이런 왕의 극진한 대접에 보답하기 위해 돌아 올 때는 이곳에 다시 들리려고 하였으나 그가 서역 구법을 마치고 돌아올 때는 이미 고창국왕이 죽고 그 아들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어 들리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도 옛날 왕궁 옆에는 금당을 비롯한 황토  불탑들과 절터가 완연히 남아있으며,인도식 복발탑(覆鉢塔) 둥근 돔 사원은 현장법사가 한 달간 이곳에 머물면서 인왕경을 설법한 곳이다. 옛날에는 이 건물에 지붕이 있었다 하나,현재는 지붕이 없고, 대신 건물의 형제는 완벽하게 남아 있다. 
 
날씨가 너무 더워 고성을 다 돌아보지는 못하였지만, 수천 년 전 불탑과 사원 터에서 융성하였던  불교가 뇌리에 떠오르고, 현장법사가 설법하던 영상이 그려지곤 한다. 무상하게  흘러가는 세월 속에 지난날의  유위법들이 오늘에 역사가 되었듯이 인생과 권력도 그렇게 흘러가고 변천해 감을 느낀다.

나귀 마차를 타고 입구로 다시 나오자,어린이들이 물건을 팔아달라고 수없이 몰려든다.위구르족 후예들이어서 그런지 아이들이 모두 잘생겨 보인다. 팔아주고 싶은 생각은 많은데 짐만 될 것 같고, 정말 필요한 물건이 하나도 없다.  
쓸모가 없는 물품으로 손님들에게 사정을 하기보다, 이곳 같이 무더운 지역에서는 아이스크림을 팔면, 장사가 절로 될텐데. 반야바라밀다를 염송하며 차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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